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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돌 스타로 각광받을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헐리웃으로부터 천대받은 에드먼드 퍼돔(Edmund Purdom) ..
    카테고리 없음 2020. 6. 22. 21:41

    로맨틱 멜로인 <황태자의 첫사랑, 1954년>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던 그는 영국 허드퍼드셔에서 태어나 40년대 중반 무대에 올라 ‘로미오와 줄리엣’ 처럼 세익스피어 고전을 통해 연극배우로 먼저 연기를 시작했다. 1946년 노샘프턴 레퍼토리 극단에서 <로미오와 줄리엣>를 비롯하여 세익스피어 작품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그후 왕립 세익스피어극단에서 2년간 머물며 로렌스 올리비에의 눈을 사로 잡았다. 1950년 영국 텔리비젼 뮤지컬 <카리스마>로 극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이후 다양한 TV 드라마를 거친 후 1953년 말론 브란도 주연의 세익스피어 작품인 <줄리어스 시저>의 스트라토 역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듬해 출연한 리처드 소프의 매력적인 뮤지컬, <황태자의 첫사랑, The Student Prince, 1954년>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 배우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귀공자같은 외모와 반듯한 이목구비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일본, 한국을 비롯하여 동남아권에서 그가 큰 인기를 누리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그는 헐리웃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워너브러더스는 그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6백달러를 선금으로 보내며 비행기 티켓을 끊기를 원했다. 특히 그가 등장한 50년대는 이전 세대의 퇴보하는 배우들과 근육질 스타가 한데 어우러진 시기였던터라 여성 관객을 끌어모을 미남인 그의 등장은 무더운 여름날 쏟아지는 한줄기의 단비와도 같았다. 하지만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 하물며 20세기폭스와도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지만 ‘연기력이 부족하다’ 거나 ‘너무 영국적’ 이라는 이유로 고배를 들었다. 그는 그무렵,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 버스를 탈 돈이 없어서 스튜디오에서 다른 스튜디오까지 뛰어다녔다” 라고 회고했을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 그는 MGM에서 제작한 세익스피어 원작의 <줄리어스 시저, 1953년>에 말론 브란도, 제임스 메이슨, 그리고 루이스 칼헌 같은 대스타들과 함께 출연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때 그를 눈여겨 본 감독 조지 쿠거는 그를 스튜디오의 찰스 브라켓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MGM과 장기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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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그는 마리오 란자가 퇴짜를 맞은 로맨틱한 뮤지컬, <황태자의 첫사랑, 1954년>에 앤 블리스의 상대역으로 캐스팅되었고 이 작품의 세계적인 흥행에 힘입어 스타덤에 올라섰다. 이어 말론 브란도가 맡기로 되어 있던 스펙타컬한 서사극, <이집트인, 1954년>에 존 데릭, 존 카사베츠, 그리고 카메론 밋첼 등을 제치고 캐스팅되는 행운이 따랐다. 그는 이후 MGM이 심혈을 기울인 뮤지컬, <아테네, Athena, 1954년>와 라나 터너와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돌아온 탕아, The Prodigal, 1955년>, 그리고 다시한번 앤 블리스와 커플로 기용한 <왕의 도둑, The King’s Thief, 1955년>는 예상과는 달리 흥행에서 심각한 참패를 맛보았다. 다행히 <황태자의 첫사랑>의 상업적인 대성공은 독설가로 유명한 헤다 호퍼마저 “헐리우드에서 가장 놀랍고 주목할만한 인물” 이라고 치켜 세우면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50년대 실패한 일련의 작품들은 결국 그를 헐리웃에서부터 몰아내는 구실을 주었고 당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이탈리아 영화계로 건너갔다. 그는 자신처럼 헐리웃의 주류에서 내몰린 존 드류 배리모어(John Drew Barrymore, 1932~2004), 카를로스 톰슨, 여배우 조지아 몰 등과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제작비가 투자된 영화에 등장하였다. 그 무렵 출연한 영화 중에는 <해롯 대왕, 1959년>, <코삭스, 1960년>, 그리고 <살람보, 1960년>, 등이 있었지만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잊혀진 작품이 되었다. 1962년 그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헐리우드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위, 상징, 그리고 대중적 이미지가 나의 육신을 옭아 매는 것 같았다” 라고 토로할만큼 헐리웃 생활과는 원칙적으로 맞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토로했다. 비록 목소리가 뮤지컬 영화에 걸맞지 않았다는 그는 팬들의 손가락 질에도 불구하고 아내인 린다 크리스티안과 미국 곳곳을 돌아 다녔다. 1962년 아내인 린다와 1년만에 결별한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TV나 영화에서 더빙 배우로 활동하였다. 드문드문 <콩고드 79, 1979년>, <천국의 샴페인, 1984년>같은 영화에 출연하던 그는 2001년 <나이트 오브 더 퀘스트>를 끝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는 린다 크리스티안을 포함하여 모두 4차례 결혼했지만 그중 세번은 이혼했고 첫 아내인 티타 필립스 사이에 두 자녀를 낳았다. 그의 딸, 릴란 퍼돔은 프랑스의 TV 채널, TF1의 기자로 활동했는데 그녀는 아부지의 전기와 관련한 ‘헐리우드 차고’ 를 저술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2009년 새해 첫날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84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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